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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1. 개요 [편집]
마테르 전쟁의 후반부(동맹국 참전 ~ 종전)를 다루는 문서.
2. 경과 [편집]
2.1. 두 동맹국 [편집]
체르드는 전쟁 발발 초기부터, 마베라에 무기를 지원했던 대표적인 친 마베라 국가이다. 그러나 체르드의 참전은 단순한 우호적 제스처가 아닌, 철저한 전략적 이해에 따른 결정이었다. 마테르 전쟁 발발 직후, 웨스타시아(한랜드)가 개시한 브루스파팅턴 해상봉쇄 작전은 체르드에 직접적이고도 심각한 경제적 타격을 입혔다. 이 작전은 웨스타시아 해군이 북랜드 일대의 주요 해상 수송로를 차단하여, 체르드를 포함한 국가들이 육로 외에는 외부와의 무역이 거의 불가능하도록 만든 것이었다. 특히 체르드는 서해 항만도시 파우스트를 통해 대부분의 식량, 석유, 공업 원자재를 수입하고 있었기 때문에, 해상 수송망의 마비는 사실상 국가 기능의 일부 정지를 의미했다.
경제적 고립 속에서 체르드는 상황을 곧바로 안보 위기로 인식했다. 바로 인접한 마베라 왕국이 침공을 받아 국토 대부분을 상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마베라가 함락된다면, 체르드는 웨스타시아와 국경을 맞대는 최전방 국가가 되는 셈이었고, 이는 국방 인프라가 미비한 상태였던 체르드에게 감당할 수 없는 위협이었다. 이 같은 위기 의식 속에서, 체르드는 마베라를 지지하는 편에 서기로 결정한다.
사실 체르드가 마베라를 지원하기로 한 이유는 명백했다. 마베라가 이길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루이나는 마테르 전쟁 초기 공식적으로는 중립을 선언했으나, 실질적으로는 마베라 왕국을 정치·군사적으로 지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루이나 정부는 직접적인 무기 제공이나 군사개입이 국제 외교질서, 특히 북랜드–랜드해협 안보 균형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비공식적·우회적 경로를 통해 마베라를 지원하는 전략을 채택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체르드 경유 무기 임대 프로그램’이었다. 루이나는 동맹국 체르드에 '공동훈련 및 안보협력을 위한 무상임대'라는 명목으로 대규모 무기를 제공했다. 여기에는 중형 전차, 다연장 로켓포, 대공포, 통신장비, 총기와 석유 등, 전쟁에 필요한 거의 모든 물자를 제공하였다.
공식적으로는 체르드 자위 역량 강화를 위한 협력으로 포장되었지만, 이 무기들의 상당수가 곧바로 마베라 전선에 등장했으며, 체르드 육군이 '독자적 판단에 따라 마베라에 군사물자를 이전했다'고 밝히면서, 실질적 우회지원이 이루어졌음이 외교가에 널리 알려졌다.
이 과정은 철저한 외교적 암묵성과 형식적 합법성 아래 이루어졌기 때문에, 루이나 정부는 "체르드에 무기를 빌려준 것일 뿐, 체르드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체르드의 주권사항"이라는 입장을 견지했다. 그러나 루이나군 내부 자료와 국방위원회 회의록 일부가 유출되면서, 해당 무기 중 다수가 처음부터 ‘제3국 이전 가능’을 전제로 출고된 사실이 드러나, 외교적 '눈가리고 아웅'이라는 비판이 일기도 했다.
체르드는 공화국 체제였지만, 당시 집권 중이던 보수 우파 정당이 왕정국가인 마베라와 비교적 안정적인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실제로 두 국가는 수년 전부터 군사 기술 협력, 국경 관리 조약 등을 통해 상호 방위체제를 조율한 바 있었다. 이러한 전제 위에서, 체르드는 마베라와의 공동 방어를 선언하며 전면 참전했고, 결과적으로 마베라–체르드 연합군이 북부 전선에 방어선을 형성하는 데 일정한 성과를 거두게 된다.
반면, 델라웨어는 전쟁 발발 초기부터 웨스타시아 진영과의 정치적·군사적 연대를 추진했다. 델라웨어는 오래 전부터 마베라의 왕정 체제와 귀족 중심의 통치구조를 "시대착오적 봉건국가"라 비판해왔고, 그에 반해 웨스타시아가 추진하던 중앙집권적·파시즘적 국가 혁신 모델에는 일정 수준의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델라웨어는 당시 군정과 치안조직이 권력을 함께 장악한 준독재 국가였으며, 형식적으론 중립을 표방했지만, 웨스타시아의 마베라 침공 직후 외교적 방향을 빠르게 재조정한다. 특히 브루스파팅턴 작전의 공동 실행국 중 하나로 자처하면서, 웨스타시아와 해상봉쇄 작전의 이익 배분 협상을 맺는다. 델라웨어는 봉쇄망의 일부를 피해갈 수 있는 해역 구획권과 중계무역권 확보를 조건으로 웨스타시아와 경제 협력을 강화했고, 이는 사실상 전쟁의 공동 수행 계약이었다.
더불어 마베라가 무너지면 체르드가 북랜드의 새로운 맹주가 될 가능성을 차단하고, 델라웨어가 그 자리를 대신하겠다는 정치적 계산도 있었다. 이러한 판단 속에, 델라웨어는 웨스타시아와 군사협력 조약을 체결하고, 일부 병력을 웨스타시아 지휘 아래 전선에 파병하기에 이른다. 북랜드 전쟁 구도는 이로써 마베라–체르드 대 웨스타시아–델라웨어라는 양 진영 체계로 본격화되었고, 이 구도는 사실상 전쟁 후반부까지 유지된다.
경제적 고립 속에서 체르드는 상황을 곧바로 안보 위기로 인식했다. 바로 인접한 마베라 왕국이 침공을 받아 국토 대부분을 상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마베라가 함락된다면, 체르드는 웨스타시아와 국경을 맞대는 최전방 국가가 되는 셈이었고, 이는 국방 인프라가 미비한 상태였던 체르드에게 감당할 수 없는 위협이었다. 이 같은 위기 의식 속에서, 체르드는 마베라를 지지하는 편에 서기로 결정한다.
사실 체르드가 마베라를 지원하기로 한 이유는 명백했다. 마베라가 이길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루이나는 마테르 전쟁 초기 공식적으로는 중립을 선언했으나, 실질적으로는 마베라 왕국을 정치·군사적으로 지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루이나 정부는 직접적인 무기 제공이나 군사개입이 국제 외교질서, 특히 북랜드–랜드해협 안보 균형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비공식적·우회적 경로를 통해 마베라를 지원하는 전략을 채택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체르드 경유 무기 임대 프로그램’이었다. 루이나는 동맹국 체르드에 '공동훈련 및 안보협력을 위한 무상임대'라는 명목으로 대규모 무기를 제공했다. 여기에는 중형 전차, 다연장 로켓포, 대공포, 통신장비, 총기와 석유 등, 전쟁에 필요한 거의 모든 물자를 제공하였다.
공식적으로는 체르드 자위 역량 강화를 위한 협력으로 포장되었지만, 이 무기들의 상당수가 곧바로 마베라 전선에 등장했으며, 체르드 육군이 '독자적 판단에 따라 마베라에 군사물자를 이전했다'고 밝히면서, 실질적 우회지원이 이루어졌음이 외교가에 널리 알려졌다.
이 과정은 철저한 외교적 암묵성과 형식적 합법성 아래 이루어졌기 때문에, 루이나 정부는 "체르드에 무기를 빌려준 것일 뿐, 체르드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체르드의 주권사항"이라는 입장을 견지했다. 그러나 루이나군 내부 자료와 국방위원회 회의록 일부가 유출되면서, 해당 무기 중 다수가 처음부터 ‘제3국 이전 가능’을 전제로 출고된 사실이 드러나, 외교적 '눈가리고 아웅'이라는 비판이 일기도 했다.
체르드는 공화국 체제였지만, 당시 집권 중이던 보수 우파 정당이 왕정국가인 마베라와 비교적 안정적인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실제로 두 국가는 수년 전부터 군사 기술 협력, 국경 관리 조약 등을 통해 상호 방위체제를 조율한 바 있었다. 이러한 전제 위에서, 체르드는 마베라와의 공동 방어를 선언하며 전면 참전했고, 결과적으로 마베라–체르드 연합군이 북부 전선에 방어선을 형성하는 데 일정한 성과를 거두게 된다.
반면, 델라웨어는 전쟁 발발 초기부터 웨스타시아 진영과의 정치적·군사적 연대를 추진했다. 델라웨어는 오래 전부터 마베라의 왕정 체제와 귀족 중심의 통치구조를 "시대착오적 봉건국가"라 비판해왔고, 그에 반해 웨스타시아가 추진하던 중앙집권적·파시즘적 국가 혁신 모델에는 일정 수준의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델라웨어는 당시 군정과 치안조직이 권력을 함께 장악한 준독재 국가였으며, 형식적으론 중립을 표방했지만, 웨스타시아의 마베라 침공 직후 외교적 방향을 빠르게 재조정한다. 특히 브루스파팅턴 작전의 공동 실행국 중 하나로 자처하면서, 웨스타시아와 해상봉쇄 작전의 이익 배분 협상을 맺는다. 델라웨어는 봉쇄망의 일부를 피해갈 수 있는 해역 구획권과 중계무역권 확보를 조건으로 웨스타시아와 경제 협력을 강화했고, 이는 사실상 전쟁의 공동 수행 계약이었다.
더불어 마베라가 무너지면 체르드가 북랜드의 새로운 맹주가 될 가능성을 차단하고, 델라웨어가 그 자리를 대신하겠다는 정치적 계산도 있었다. 이러한 판단 속에, 델라웨어는 웨스타시아와 군사협력 조약을 체결하고, 일부 병력을 웨스타시아 지휘 아래 전선에 파병하기에 이른다. 북랜드 전쟁 구도는 이로써 마베라–체르드 대 웨스타시아–델라웨어라는 양 진영 체계로 본격화되었고, 이 구도는 사실상 전쟁 후반부까지 유지된다.
2.2. 딮스마르크 추격전: 봉쇄가 뚫리다 [편집]
자세한건 딮스마르크 추격전문서를 참고.
2.3. 벵가지 상륙 [편집]
자세한건 벵가지 상륙전문서를 참고.
2.4. 대공세 [편집]
1983년 가을, 마베라–체르드 연합군은 전선을 일제히 반격하기 시작했다. 참호전과 장마로 한동안 고착되어 있던 전황은, 7월 장마 종료와 동시에 점진적 전환을 예고했으며, 루이나를 비롯한 제3국의 물자·정보 지원이 본격화되면서 전쟁의 흐름은 서서히 ‘되돌려지기’ 시작했다. 이 대공세는 마베라 왕국 수뇌부가 전격적으로 승인한 '국민총동원계획 제12호'의 일환으로 시행된 일련의 반격 작전 묶음으로,
2.4.1. 노르트란트 회랑 전투 [편집]
1983년 가을, 마베라–체르드 연합군의 대공세가 시작되며 침체되어 있던 전쟁 양상이 서서히 전환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 연합군이 가장 주목한 지역은 북부 노르트란트 회랑이었다. 이 지역은 카르비크 고원과 로흐스 평야 사이를 잇는 좁고 긴 병목지대였으며, 웨스타시아군이 마베라 북부를 점령한 이래 줄곧 군수 보급의 핵심 동맥으로 기능해왔다.
웨스타시아 제3기갑군단은 이 회랑을 통해 전차 연료, 포탄, 식량, 의약품 등 각종 보급품을 남부 전선과 솔로몬 돌출부 전방까지 전달하고 있었고, 실질적으로 회랑의 유지 여부가 전선 전체의 지속 가능성을 좌우하고 있었다. 마베라와 체르드의 군사 지도부는 이 병참선을 차단하는 것이 일시적 승리가 아닌 전략적 전환을 이끌 유일한 열쇠라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연합군은 병참선 자체를 공격하는 전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회랑 전체의 후방 인프라를 '침묵시킨다'는 개념의 작전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이 작전은 무력 충돌에만 의존하지 않고 도로망, 철도망, 통신선, 연료 저장고, 야전 창고, 물류 집결지 등 보급 체계를 구성하는 ‘비전투 자산’을 우선적으로 제거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루이나는 작전 초기부터 이미 정보, 공중정찰, 위성영상 분석 등을 통해 웨스타시아군 보급망의 노드(node) 구조를 정밀하게 해부하고 있었다. 이 분석을 바탕으로 루이나 공군은 마베라 공군과 협조하여 10월 중순부터 회랑 남단의 우에르테 저장기지, 라민 터널, 노스 로지 철도삼각지에 대한 집중 폭격을 개시했다.
특히 라민 터널은 웨스타시아군이 철도 화물을 통과시켜 전선으로 수송하는 주요 관문이었는데, 루이나의 폭격기 한 대가 심야 기습 폭격을 감행해 구조물 일부를 무너뜨리며 수주간 열차 운행이 전면 중단되었다. 뒤이어 마베라군 결사대가 투입되어 잔존 구조물을 완전히 폭파시킴으로써 복구 불능 상태로 만들었다.
다음 타깃은 병참 수송 차량의 집결지였다. 노르트란트 중부에는 소형 물류 차량과 보급품 창고가 집적된 '케셀벨트 보급지구'가 있었는데, 루이나 공군은 이 지역에 대한 정밀타격과 함께 전자전기를 투입해 차량 무전과 위치 추적 체계를 마비시켰다. 이로 인해 웨스타시아군의 전선 배급은 혼선과 지연이 반복되었고, 식량 부족과 연료 고갈로 기계화 부대 일부는 사실상 방치되다시피 했다. 뿐만 아니라, 루이나의 국가정찰국은 웨스타시아의 병참 암호 체계를 분석해 오발신을 유도하고, 위장된 허위 신호로 보급차량을 잘못된 경로로 유인하는 데 성공했다. 이로 인해 병참선은 물리적 파괴뿐 아니라 체계적 혼란에 의한 기능 마비 상태에 빠졌다.
8월 초, 웨스타시아 제3기갑군단의 보급지휘본부는 "회랑 남단에서 중부까지 하루 평균 보급률이 38%로 하락했다"는 내부 평가를 내놓았고, 이는 사실상 보급선의 기능 단절을 의미하는 수치였다. 포탄은 할당량의 절반도 채 도착하지 않았으며, 전차 연료는 기지 재고로만 운용 가능한 수준이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병사들이 가열되지 않은 통조림과 부족한 응급약으로 생존을 버텨야 했고, 환자 이송도 중단되면서 회랑 남단은 전장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다.
결정타는 케르덴 수로 통제소의 폭파였다. 이 수로는 회랑을 통과해 마베라 북부까지 식수와 정수 처리를 공급하던 시설로, 루이나 특수공작대가 매설한 수중 폭발물이 8월 11일 새벽 정각에 기폭되었다. 수로의 붕괴로 인해 수천 명의 병력이 식수 확보에 실패했고, 이에 따른 장티푸스 및 설사병 유행으로 비전투 손실이 실제 전투 사망자 수를 추월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노르트란트 회랑은 전투 이전에 병참이 먼저 붕괴한 전장으로 기억된다. 포성이 멎기 전, 이미 연료와 식수, 식량과 탄약이 끊긴 웨스타시아군은 스스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마베라–체르드 연합군의 본격적인 지상 반격은 그 뒤에 이어졌을 뿐이었다.
웨스타시아 제3기갑군단은 이 회랑을 통해 전차 연료, 포탄, 식량, 의약품 등 각종 보급품을 남부 전선과 솔로몬 돌출부 전방까지 전달하고 있었고, 실질적으로 회랑의 유지 여부가 전선 전체의 지속 가능성을 좌우하고 있었다. 마베라와 체르드의 군사 지도부는 이 병참선을 차단하는 것이 일시적 승리가 아닌 전략적 전환을 이끌 유일한 열쇠라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연합군은 병참선 자체를 공격하는 전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회랑 전체의 후방 인프라를 '침묵시킨다'는 개념의 작전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이 작전은 무력 충돌에만 의존하지 않고 도로망, 철도망, 통신선, 연료 저장고, 야전 창고, 물류 집결지 등 보급 체계를 구성하는 ‘비전투 자산’을 우선적으로 제거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루이나는 작전 초기부터 이미 정보, 공중정찰, 위성영상 분석 등을 통해 웨스타시아군 보급망의 노드(node) 구조를 정밀하게 해부하고 있었다. 이 분석을 바탕으로 루이나 공군은 마베라 공군과 협조하여 10월 중순부터 회랑 남단의 우에르테 저장기지, 라민 터널, 노스 로지 철도삼각지에 대한 집중 폭격을 개시했다.
특히 라민 터널은 웨스타시아군이 철도 화물을 통과시켜 전선으로 수송하는 주요 관문이었는데, 루이나의 폭격기 한 대가 심야 기습 폭격을 감행해 구조물 일부를 무너뜨리며 수주간 열차 운행이 전면 중단되었다. 뒤이어 마베라군 결사대가 투입되어 잔존 구조물을 완전히 폭파시킴으로써 복구 불능 상태로 만들었다.
다음 타깃은 병참 수송 차량의 집결지였다. 노르트란트 중부에는 소형 물류 차량과 보급품 창고가 집적된 '케셀벨트 보급지구'가 있었는데, 루이나 공군은 이 지역에 대한 정밀타격과 함께 전자전기를 투입해 차량 무전과 위치 추적 체계를 마비시켰다. 이로 인해 웨스타시아군의 전선 배급은 혼선과 지연이 반복되었고, 식량 부족과 연료 고갈로 기계화 부대 일부는 사실상 방치되다시피 했다. 뿐만 아니라, 루이나의 국가정찰국은 웨스타시아의 병참 암호 체계를 분석해 오발신을 유도하고, 위장된 허위 신호로 보급차량을 잘못된 경로로 유인하는 데 성공했다. 이로 인해 병참선은 물리적 파괴뿐 아니라 체계적 혼란에 의한 기능 마비 상태에 빠졌다.
8월 초, 웨스타시아 제3기갑군단의 보급지휘본부는 "회랑 남단에서 중부까지 하루 평균 보급률이 38%로 하락했다"는 내부 평가를 내놓았고, 이는 사실상 보급선의 기능 단절을 의미하는 수치였다. 포탄은 할당량의 절반도 채 도착하지 않았으며, 전차 연료는 기지 재고로만 운용 가능한 수준이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병사들이 가열되지 않은 통조림과 부족한 응급약으로 생존을 버텨야 했고, 환자 이송도 중단되면서 회랑 남단은 전장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다.
결정타는 케르덴 수로 통제소의 폭파였다. 이 수로는 회랑을 통과해 마베라 북부까지 식수와 정수 처리를 공급하던 시설로, 루이나 특수공작대가 매설한 수중 폭발물이 8월 11일 새벽 정각에 기폭되었다. 수로의 붕괴로 인해 수천 명의 병력이 식수 확보에 실패했고, 이에 따른 장티푸스 및 설사병 유행으로 비전투 손실이 실제 전투 사망자 수를 추월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노르트란트 회랑은 전투 이전에 병참이 먼저 붕괴한 전장으로 기억된다. 포성이 멎기 전, 이미 연료와 식수, 식량과 탄약이 끊긴 웨스타시아군은 스스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마베라–체르드 연합군의 본격적인 지상 반격은 그 뒤에 이어졌을 뿐이었다.
2.4.2. 강타 작전 [편집]
솔로몬 돌출부는 마베라 중부 전선에서 유일하게 웨스타시아군이 동쪽으로 깊숙이 박힌 형태의 교두보를 형성한 지역이었다. 산지와 고원 사이로 형성된 완만한 구릉지대에 펼쳐진 이 지형은 전선의 균형을 크게 무너뜨리는 돌출된 압력점으로, 웨스타시아군은 이 지역을 기반으로 마베라 심장부를 위협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고 있었다. 반대로 마베라 측에게 이 돌출부는 전략적으로 도려내야 할 종기와도 같았다.
이에 따라 마베라–체르드 연합군은 ‘국민총동원계획 제12호’의 중심축으로 돌출부 제거를 위한 전면적 반격 작전, 즉 ‘강타 작전(Operation smash)’'''을 수립했다. 이 작전은 명목상 48시간 동안의 강력한 포격과 기갑 돌격으로 솔로몬 돌출부의 방어선을 박살내고, 남북에서 포위망을 닫아 적 3개 사단을 고립·섬멸하는 작전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훨씬 더 피비린내나는 고전의 연속이었다.
전투는 1983년 9월 6일 새벽, 체르드군 제22기계화사단이 남부 전선의 평지 돌출구를 기습 공격하며 시작되었다. 북측에선 마베라군 제7기갑사단과 제18보병사단이 동시 기동하여 돌출부 전체를 감싸는 양동 작전에 들어갔다. 마베라 공군의 제공권 확보와 루이나 정찰망의 지원이 있었지만, 웨스타시아군도 이 전투만큼은 철저히 준비하고 있었다.
특히 돌출부 중심에는 제12포병여단과 제55방공연대가 중첩 배치되어 있어, 첫날 기갑 돌파 시도에서 마베라 측 전차 36대가 순식간에 파괴되며 진격이 멈추는 사태가 벌어졌다. 공세는 멈추지 않았지만, 진격은 단 2킬로미터를 넘기지 못한 채 초반 3일간 매일 1천 명 이상이 사상되는 소모전으로 흘렀다. 체르드 측은 제41차량화사단 전면 붕괴, 제19의무단 전멸 등 회복 불가능한 손실을 입었고, 마베라군은 야전사령부를 두 차례나 이전해야 할 만큼 포격과 급습에 시달렸다. 진창과 혼란, 전열 붕괴 속에서도 9월 14일 밤, 마베라 제7기갑사단이 북측 포위망을 완성시키면서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고립된 웨스타시아군은 외부 보급이 차단되었고, 항복 권유 방송이 이어졌지만 저항은 예상보다 끈질겼다. 제9공병대는 후방 고지를 폭파해 일시적으로 포위망을 열었고, 제14기동보병대대는 루이나-마베라 연합 포병대를 습격해 탄약고 하나를 폭파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결정적 전환점은 9월 18일, 마베라 공군의 “에이브럼 작전” 하 강습기가 돌출부 중앙의 통신지휘소를 파괴하면서 도래했다. 이후 남측 체르드군이 동부 능선까지 밀고 들어가며 포위망을 재봉쇄했고, 9월 22일, 남은 웨스타시아 병력 9,300명은 대부분 전투불능 상태로 항복하거나 산개 탈출을 시도하다 무력화되었다.
이에 따라 마베라–체르드 연합군은 ‘국민총동원계획 제12호’의 중심축으로 돌출부 제거를 위한 전면적 반격 작전, 즉 ‘강타 작전(Operation smash)’'''을 수립했다. 이 작전은 명목상 48시간 동안의 강력한 포격과 기갑 돌격으로 솔로몬 돌출부의 방어선을 박살내고, 남북에서 포위망을 닫아 적 3개 사단을 고립·섬멸하는 작전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훨씬 더 피비린내나는 고전의 연속이었다.
전투는 1983년 9월 6일 새벽, 체르드군 제22기계화사단이 남부 전선의 평지 돌출구를 기습 공격하며 시작되었다. 북측에선 마베라군 제7기갑사단과 제18보병사단이 동시 기동하여 돌출부 전체를 감싸는 양동 작전에 들어갔다. 마베라 공군의 제공권 확보와 루이나 정찰망의 지원이 있었지만, 웨스타시아군도 이 전투만큼은 철저히 준비하고 있었다.
특히 돌출부 중심에는 제12포병여단과 제55방공연대가 중첩 배치되어 있어, 첫날 기갑 돌파 시도에서 마베라 측 전차 36대가 순식간에 파괴되며 진격이 멈추는 사태가 벌어졌다. 공세는 멈추지 않았지만, 진격은 단 2킬로미터를 넘기지 못한 채 초반 3일간 매일 1천 명 이상이 사상되는 소모전으로 흘렀다. 체르드 측은 제41차량화사단 전면 붕괴, 제19의무단 전멸 등 회복 불가능한 손실을 입었고, 마베라군은 야전사령부를 두 차례나 이전해야 할 만큼 포격과 급습에 시달렸다. 진창과 혼란, 전열 붕괴 속에서도 9월 14일 밤, 마베라 제7기갑사단이 북측 포위망을 완성시키면서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고립된 웨스타시아군은 외부 보급이 차단되었고, 항복 권유 방송이 이어졌지만 저항은 예상보다 끈질겼다. 제9공병대는 후방 고지를 폭파해 일시적으로 포위망을 열었고, 제14기동보병대대는 루이나-마베라 연합 포병대를 습격해 탄약고 하나를 폭파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결정적 전환점은 9월 18일, 마베라 공군의 “에이브럼 작전” 하 강습기가 돌출부 중앙의 통신지휘소를 파괴하면서 도래했다. 이후 남측 체르드군이 동부 능선까지 밀고 들어가며 포위망을 재봉쇄했고, 9월 22일, 남은 웨스타시아 병력 9,300명은 대부분 전투불능 상태로 항복하거나 산개 탈출을 시도하다 무력화되었다.
2.4.3. 마레트 라인 돌파 작전 [편집]
강타 전투 이후 중부 전선이 전술적으로 교착되자, 마베라–체르드 연합지휘부는 중부 아크로마–미스라타 일대의 전선 돌파를 전격 결정한다. 이 지역은 상대적으로 지형이 평탄하고, 고원과 평야가 만나는 완충지대에 해당해 전차기동전에 적합한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전선은 오랫동안 방어 중심의 고착 상태였고, 이미 마베라군과 웨스타시아군 모두에게 지뢰대, 참호망, 고착화된 중화기 진지가 빽빽이 늘어선 "움직이지 않는 전선"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하지만 마베라군 수뇌부는 솔로몬 돌출부 붕괴 이후 전선이 일시적으로 재편되고 있는 틈을 노릴 수 있다고 판단했다. 특히 웨스타시아군 제14보병사단과 제6혼성기갑대대가 재보급과 병력 충원을 위해 일부 병력을 철수한 상황을 정찰망이 포착하면서, 돌파 작전은 빠르게 실전 계획으로 전환된다.
작전명은 「브레이크사우스(Operation Breaksouth)」, 지휘는 마베라군 헨리크 로드페르 장군과 체르드군 니콜라 슈테판 대장이 공동 담당하였다. 루이나군은 작전 당시 후방 항공정찰 및 무선교란 지원, 남부 국경 초계망 확장, 차량형 전자전 장비 제공 등의 형태로 깊이 개입하고 있었다.
작전은 1983년 10월 3일 새벽 4시, 마베라 제2기갑사단과 체르드 제5전차여단이 선두에 서서 아크로마 북동부의 방어진지에 기습 포격을 퍼부으며 개시되었다. 루이나 항공정찰대로부터 확보된 진지 배치 정보에 따라, 포병은 지휘통신소, 탄약고, 야전 발전기 등 비탄 핵심 시설을 우선 제거했다. 뒤이어 160대 이상의 전차와 장갑차가 전속력으로 진입하며 첫 돌파 구간을 단 7시간 만에 열어젖혔다.
10월 4일, 미스라타 북측의 방어진지가 무너지며 웨스타시아군의 제14보병사단 좌익이 붕괴되었다. 남아 있던 기갑대대는 지원 없이 고립되었고, 마베라군 선봉부대는 이틀 만에 48킬로미터를 전진, 아크로마와 미스타라를 연결하는 교차 물류허브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체르드군은 이 돌파구를 확대하기 위해 ‘코브라 라인’으로 명명된 중부 능선 방어선을 포위해 들어갔고, 이에 맞선 웨스타시아군은 퇴각과 반격을 병행하는 지연전술을 펼쳤으나 지형의 한계로 인해 효과는 미미했다. 웨스타시아 측이 진지 철수를 명령한 것은 10월 7일. 그러나 이 결정은 이미 너무 늦었다. 마베라–체르드 연합군은 미스라타 서부 비행장과 유류 저장소, 중형 철도 분기점을 포획했으며, 전선은 단 1주일 만에 남동방향으로 80킬로미터 이상 전진했다.
마레트 라인 돌파는 전통적인 교착전 양상을 뒤엎은 전격적 기갑 작전의 성공 사례로 기록되었다. 마베라군은 전차 손실 140여 대, 전사자 약 3,200명을 감수했지만, 웨스타시아군은 동부 방어망 전반이 붕괴되며 3개 여단이 후퇴, 2개 기갑중대가 포위 및 항복, 1개 야전사령부가 해체되는 전선 붕괴 사태를 겪었다.
이 돌파는 웨스타시아군이 남부에서의 작전 주도권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마베라 측은 이를 기반으로 다우엘 평야와 동부 도시권 진격 작전의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었다. 또한 루이나 정보국은 작전 직후 웨스타시아군의 내부 무전 일부를 해독하여, “동부 사단은 응답 없다(East Command is silent)”라는 문구를 국내 언론에 노출시켰고, 이는 이 작전의 상징적 명제로 퍼지게 되었다.
이 작전으로 전선 전체의 주도권이 마베라–체르드 측으로 전환되었으며, 웨스타시아군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서둘러 2차 방어선을 구축하고 서부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 공세는 루이나의 간접 개입이 실질적인 전략 변수로 부상한 국면이었다. 특히 위성 정찰, 전자전 지원, 화학·방사능 보호장비 공급 등은 연합군의 전술적 능력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렸으며, 루이나가 단순한 외교적 지지국을 넘어 전쟁에 일정 수준 이상 ‘투명하게’ 개입하기 시작했음을 암시했다.
마베라 국내에서는 이 시기부터 "트리넬을 되찾자"는 구호가 본격적으로 퍼지기 시작했고, 국왕 상 페드로 3세는 직접 말을 타고 전선을 순시하며 군민 사기를 북돋았다. 반면, 웨스타시아 총사령부는 내심 작전의 실패를 인정하면서도 외부에는 '임시적 반동'이라는 해석으로 일관하며 전선 유지에 몰두했다.
결과적으로, 대공세는 마테르 전쟁의 결정적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전쟁 초반 7일간의 급속 침공으로 얻은 전략적 우위를 한랜드 측이 이 시기부터 급격히 상실하기 시작했으며, 이후 마베라군의 주도 아래 전장은 점차 서쪽으로 밀려갔다.
하지만 마베라군 수뇌부는 솔로몬 돌출부 붕괴 이후 전선이 일시적으로 재편되고 있는 틈을 노릴 수 있다고 판단했다. 특히 웨스타시아군 제14보병사단과 제6혼성기갑대대가 재보급과 병력 충원을 위해 일부 병력을 철수한 상황을 정찰망이 포착하면서, 돌파 작전은 빠르게 실전 계획으로 전환된다.
작전명은 「브레이크사우스(Operation Breaksouth)」, 지휘는 마베라군 헨리크 로드페르 장군과 체르드군 니콜라 슈테판 대장이 공동 담당하였다. 루이나군은 작전 당시 후방 항공정찰 및 무선교란 지원, 남부 국경 초계망 확장, 차량형 전자전 장비 제공 등의 형태로 깊이 개입하고 있었다.
작전은 1983년 10월 3일 새벽 4시, 마베라 제2기갑사단과 체르드 제5전차여단이 선두에 서서 아크로마 북동부의 방어진지에 기습 포격을 퍼부으며 개시되었다. 루이나 항공정찰대로부터 확보된 진지 배치 정보에 따라, 포병은 지휘통신소, 탄약고, 야전 발전기 등 비탄 핵심 시설을 우선 제거했다. 뒤이어 160대 이상의 전차와 장갑차가 전속력으로 진입하며 첫 돌파 구간을 단 7시간 만에 열어젖혔다.
10월 4일, 미스라타 북측의 방어진지가 무너지며 웨스타시아군의 제14보병사단 좌익이 붕괴되었다. 남아 있던 기갑대대는 지원 없이 고립되었고, 마베라군 선봉부대는 이틀 만에 48킬로미터를 전진, 아크로마와 미스타라를 연결하는 교차 물류허브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체르드군은 이 돌파구를 확대하기 위해 ‘코브라 라인’으로 명명된 중부 능선 방어선을 포위해 들어갔고, 이에 맞선 웨스타시아군은 퇴각과 반격을 병행하는 지연전술을 펼쳤으나 지형의 한계로 인해 효과는 미미했다. 웨스타시아 측이 진지 철수를 명령한 것은 10월 7일. 그러나 이 결정은 이미 너무 늦었다. 마베라–체르드 연합군은 미스라타 서부 비행장과 유류 저장소, 중형 철도 분기점을 포획했으며, 전선은 단 1주일 만에 남동방향으로 80킬로미터 이상 전진했다.
마레트 라인 돌파는 전통적인 교착전 양상을 뒤엎은 전격적 기갑 작전의 성공 사례로 기록되었다. 마베라군은 전차 손실 140여 대, 전사자 약 3,200명을 감수했지만, 웨스타시아군은 동부 방어망 전반이 붕괴되며 3개 여단이 후퇴, 2개 기갑중대가 포위 및 항복, 1개 야전사령부가 해체되는 전선 붕괴 사태를 겪었다.
이 돌파는 웨스타시아군이 남부에서의 작전 주도권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마베라 측은 이를 기반으로 다우엘 평야와 동부 도시권 진격 작전의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었다. 또한 루이나 정보국은 작전 직후 웨스타시아군의 내부 무전 일부를 해독하여, “동부 사단은 응답 없다(East Command is silent)”라는 문구를 국내 언론에 노출시켰고, 이는 이 작전의 상징적 명제로 퍼지게 되었다.
이 작전으로 전선 전체의 주도권이 마베라–체르드 측으로 전환되었으며, 웨스타시아군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서둘러 2차 방어선을 구축하고 서부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 공세는 루이나의 간접 개입이 실질적인 전략 변수로 부상한 국면이었다. 특히 위성 정찰, 전자전 지원, 화학·방사능 보호장비 공급 등은 연합군의 전술적 능력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렸으며, 루이나가 단순한 외교적 지지국을 넘어 전쟁에 일정 수준 이상 ‘투명하게’ 개입하기 시작했음을 암시했다.
마베라 국내에서는 이 시기부터 "트리넬을 되찾자"는 구호가 본격적으로 퍼지기 시작했고, 국왕 상 페드로 3세는 직접 말을 타고 전선을 순시하며 군민 사기를 북돋았다. 반면, 웨스타시아 총사령부는 내심 작전의 실패를 인정하면서도 외부에는 '임시적 반동'이라는 해석으로 일관하며 전선 유지에 몰두했다.
결과적으로, 대공세는 마테르 전쟁의 결정적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전쟁 초반 7일간의 급속 침공으로 얻은 전략적 우위를 한랜드 측이 이 시기부터 급격히 상실하기 시작했으며, 이후 마베라군의 주도 아래 전장은 점차 서쪽으로 밀려갔다.
2.4.4. 번외: 라이넬 항 탈출 [편집]
자세한건 라이넬 항 탈출문서를 참고.
2.5. 발악: 은색작전 [편집]
1984년 1월 1일. 새해가 밝았다.
혹한기의 추위와 폭설로 다시 공세는 둔화됐지만, 이미 전쟁의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는지는 안봐도 뻔한 것이었다. 가다메스를 가로막아 상륙군을 다시 바다로 돌려보내려 했던 이드리스 작전은 처참한 실패로 돌아갔고, 그렇게 마베라 중부를 성공적으로 재패한 마베라 7,8군과 체르드 6군은 10월 29일 바르디야를 집중 공략해 한랜드군의 허리를 끊어놓았다. 몇달 전의 상황과 반대로 마베라군의 아게다비아 강북 포위망이 성공적으로 구축됨으로써, 보급선이 전멸한 최전방의 한랜드군들은 마레트 라인이 돌파된 이후부터 다음 해까지 말 그대로 속수무책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83년 11월 11일. 트리넬이 함락되었다. 15척의 수송선이 함락되어가는 트리넬을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남은 알파 집단군도 마베라땅을 떠났다. 왕궁에 꽂혀있던 백십자기는 다시 끌여내려져 불태워졌고, 국왕은 이날 열린 수도탈환 기념연설에서 승리가 눈앞에 있음을 국민들에게 상기시켰다.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4주간의 공성전 끝에 베이다의 맘무트 요새에 갇혀있던 한랜드 4군이 항복했다. 웨스타시아 공세의 최후의 교두보이자 한랜드군 공세의 상징이었던 그곳이 함락되면서, 이제 한랜드군에는 가망이 없었다.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당일에는 웨스타시아군 초반 우세의 핵심이었던 369고지에도 왕관박힌 깃발이 올라가면서 에스타뉴 서부 & 동부 회랑이 모조리 함락. 전쟁 전 국경선이 거진 1년만에 복원되었다. 새해와 함께 이제 마베라군의 숙제는 영토 탈환이 아닌, 영토 확장이 되었다.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본 웨스타시아군 총사령부는 거의 초상집 분위기였다. 특히 딮스마르크 + 수상함대 대부분의 침몰이슈로 해상 봉쇄의 주도권이 마체련합군에 넘어가버려 웨스터발트의 거리에는 굶어죽은 시체가 들끓었고 배급제가 실시되는 막장 상황이 2달째 반복됐다. 게다가 이 시점부터 앨빈 대통령의 정신병이 악화되기 시작해 대통령궁에서는 히스테리와 괴성이 하루도 끊이지 않았다.
이제 그들은 단순 울고만 있으면 안되는 처지였다. 그들은 무언가 굉장하고 장엄하고 뭐라 항의할 수 없을만큼 결정적으로 이 모오든 상황을 뒤집을 '비장의 카드'를 내야 했다. 그리고 웨스타시아 총사령부가 선택한 그 카드는「은색작전(Operation Silver)」이었다.
혹한기의 추위와 폭설로 다시 공세는 둔화됐지만, 이미 전쟁의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는지는 안봐도 뻔한 것이었다. 가다메스를 가로막아 상륙군을 다시 바다로 돌려보내려 했던 이드리스 작전은 처참한 실패로 돌아갔고, 그렇게 마베라 중부를 성공적으로 재패한 마베라 7,8군과 체르드 6군은 10월 29일 바르디야를 집중 공략해 한랜드군의 허리를 끊어놓았다. 몇달 전의 상황과 반대로 마베라군의 아게다비아 강북 포위망이 성공적으로 구축됨으로써, 보급선이 전멸한 최전방의 한랜드군들은 마레트 라인이 돌파된 이후부터 다음 해까지 말 그대로 속수무책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83년 11월 11일. 트리넬이 함락되었다. 15척의 수송선이 함락되어가는 트리넬을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남은 알파 집단군도 마베라땅을 떠났다. 왕궁에 꽂혀있던 백십자기는 다시 끌여내려져 불태워졌고, 국왕은 이날 열린 수도탈환 기념연설에서 승리가 눈앞에 있음을 국민들에게 상기시켰다.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4주간의 공성전 끝에 베이다의 맘무트 요새에 갇혀있던 한랜드 4군이 항복했다. 웨스타시아 공세의 최후의 교두보이자 한랜드군 공세의 상징이었던 그곳이 함락되면서, 이제 한랜드군에는 가망이 없었다.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당일에는 웨스타시아군 초반 우세의 핵심이었던 369고지에도 왕관박힌 깃발이 올라가면서 에스타뉴 서부 & 동부 회랑이 모조리 함락. 전쟁 전 국경선이 거진 1년만에 복원되었다. 새해와 함께 이제 마베라군의 숙제는 영토 탈환이 아닌, 영토 확장이 되었다.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본 웨스타시아군 총사령부는 거의 초상집 분위기였다. 특히 딮스마르크 + 수상함대 대부분의 침몰이슈로 해상 봉쇄의 주도권이 마체련합군에 넘어가버려 웨스터발트의 거리에는 굶어죽은 시체가 들끓었고 배급제가 실시되는 막장 상황이 2달째 반복됐다. 게다가 이 시점부터 앨빈 대통령의 정신병이 악화되기 시작해 대통령궁에서는 히스테리와 괴성이 하루도 끊이지 않았다.
이제 그들은 단순 울고만 있으면 안되는 처지였다. 그들은 무언가 굉장하고 장엄하고 뭐라 항의할 수 없을만큼 결정적으로 이 모오든 상황을 뒤집을 '비장의 카드'를 내야 했다. 그리고 웨스타시아 총사령부가 선택한 그 카드는「은색작전(Operation Silver)」이었다.
2.5.1. ???: 아니 여기로 가면 되잖아 [편집]
이쯤에서 마베라, 웨스타시아 국민들뿐만 아니라 이 전쟁을 지켜보던 대부분의 세계인들은 무언가 한가지 근본적인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왜 동쪽은 안감?"
하지만 웨스타시아 군에도 나름의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1. 문제의 토브룩 회랑은 크고 알흠다운 몬타나 산맥을 끼고있는 지형으로, 깎아지른 절벽 사이사이에 마베라가 건설해둔 지하 공군기지 열댓개가 포진해있는 악마같은 방공망을 자랑한다.[1] 때문에 웨스타시아의 주력인 공군력 투입이 봉쇄됨은 물론이고 공수부대를 사용한 작전도 불가능하다.
2. 따라서 토브룩 회랑을 넘어 마베라 서부를 치려면 육상전력으로 쳐야하는데 대부분의 병력이 서부전선 치느라 바쁜건 둘째치고 지형 자체가 워낙 험준한 산악지대라 한랜드군 특유의 기갑웨이브 전술도 쓰기 매우 어렵다.
3. 결론적으로 놓고보면 실상 보병침투가 강제되는 지형이다. 하지만 이쪽도 등산이라는 행위 자체가 여간 빡쎈게 아니기에 어마어마한 장병들의 희생을 요한다. 경사지대라 도로도 마을도 거의 없고 수송차량도 굴리기 힘들어 2차대전 시절에 마지막으로 썼던 말을 보급에 써야하는등 밥줄도 개판이다. 설상가상으로 바로 옆은 사막이라 저지대는 찌는듯한 더위와 갈증에 시달리며 고지대는 몬타나 산의 한기가 직격으로 내려와 그냥 움직이는 것도 힘들다.
한마디로 토브룩 회랑은 전투는 커녕 등산 전문가도 통과가 힘든 인외마경이었기 때문에 이 은색작전은 입안과 동시에 퇴짜를 맞고 반년이 넘는 시간동안 거의 묻혀있었다. 이는 1983년의 웨스타시아군 입장에서는 지극히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분명 더 쉬운길이 눈앞에 보이는데 굳이 공군도 전차도 못굴리고 병력만 다 죽어나가는 힘들고 괴악한 길을 왜 가겠는가.
하지만 1984년의 한랜드군은 좀 상황이 달랐다. 에스타뉴 산맥쪽의 서부전선은 완전히 밀려 본토가 침공당하는 수준이 됐고
"왜 동쪽은 안감?"
하지만 웨스타시아 군에도 나름의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1. 문제의 토브룩 회랑은 크고 알흠다운 몬타나 산맥을 끼고있는 지형으로, 깎아지른 절벽 사이사이에 마베라가 건설해둔 지하 공군기지 열댓개가 포진해있는 악마같은 방공망을 자랑한다.[1] 때문에 웨스타시아의 주력인 공군력 투입이 봉쇄됨은 물론이고 공수부대를 사용한 작전도 불가능하다.
2. 따라서 토브룩 회랑을 넘어 마베라 서부를 치려면 육상전력으로 쳐야하는데 대부분의 병력이 서부전선 치느라 바쁜건 둘째치고 지형 자체가 워낙 험준한 산악지대라 한랜드군 특유의 기갑웨이브 전술도 쓰기 매우 어렵다.
3. 결론적으로 놓고보면 실상 보병침투가 강제되는 지형이다. 하지만 이쪽도 등산이라는 행위 자체가 여간 빡쎈게 아니기에 어마어마한 장병들의 희생을 요한다. 경사지대라 도로도 마을도 거의 없고 수송차량도 굴리기 힘들어 2차대전 시절에 마지막으로 썼던 말을 보급에 써야하는등 밥줄도 개판이다. 설상가상으로 바로 옆은 사막이라 저지대는 찌는듯한 더위와 갈증에 시달리며 고지대는 몬타나 산의 한기가 직격으로 내려와 그냥 움직이는 것도 힘들다.
한마디로 토브룩 회랑은 전투는 커녕 등산 전문가도 통과가 힘든 인외마경이었기 때문에 이 은색작전은 입안과 동시에 퇴짜를 맞고 반년이 넘는 시간동안 거의 묻혀있었다. 이는 1983년의 웨스타시아군 입장에서는 지극히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분명 더 쉬운길이 눈앞에 보이는데 굳이 공군도 전차도 못굴리고 병력만 다 죽어나가는 힘들고 괴악한 길을 왜 가겠는가.
하지만 1984년의 한랜드군은 좀 상황이 달랐다. 에스타뉴 산맥쪽의 서부전선은 완전히 밀려 본토가 침공당하는 수준이 됐고
2.5.2. 칼펜슈타인 공중전, 루프트바페의 괴멸 [편집]
2.5.3. 토브룩의 참화 [편집]
2.6. 민들레 작전 유출 [편집]
한여름에 웨스타시아 군부는 너무도 비현실적인 전선에 참을성을 잃고는, 굉장하고 장엄하고 뭐라고 항의할 수 없을 만큼 결정적인 방식으로 전쟁을 끝내고 싶은 유혹에 굴복하기 시작했다.존 키건, <마테르 전쟁사>. p.169
민들레 작전 (LZ-α: Löwenzahn Plan) 은 1984년 1월부터 웨스타시아 합중국 최고전략사령부와 국가안보국, 무기정책기획청 등으로 구성된 작전기획연합체가 수립한 극비 군사작전으로, 마테르 전쟁의 교착 상태를 돌파하기 위한 핵무기 기반의 전면 전략 파괴 계획이다. 작전명 '민들레(Löwenzahn)'는 잡초의 대명사 민들레처럼 마베라군이 뽑아도 뽑아도 계속 쏟아져 나온다는 것에 착안한 작전명으로써, 연방대통령 특유의 악취미적 작명의 대표격으로 남아있다. 또한 전후 쏟아져나온 내부 문건에 따르면, 코드명인 LZ-α는 헬기 착륙장을 뜻하는 LZ(Landing Zone)와 일부러 겹치게 만들어 적들을 교란시키려는 의도였다고 밝혀졌다.
작전의 핵심 목표는 마베라 왕국의 수도 트리넬을 포함한 정치, 종교, 군사, 산업 중심지를 동시에 공격해 마베라의 국체와 사회 기반, 국민의 항전 의지를 일거에 붕괴시키는 것이었다. 이는 전통적인 전술핵 사용을 넘어, 전략핵무기를 직접 사용하는 국가 파괴 시나리오였으며, 총 9개의 목표 도시에 대해 각각의 핵탄두가 배정되어 있었다. 이들 도시는 수도 트리넬, 제2도시 칼펜, 항만 도시 벵가지, 수력발전소 및 지하벙커 밀집지대 베이다, 종교 중심지 [?], 피난민 밀집지 할파야 등이 포함되었다. 문건에 따르면, 타격 순서는 계단식이며, 가장 먼저 트리넬에 150kt급 전략핵탄두 2발이 동시 투하된 직후, 각 전역의 타격 지점에 전술핵 또는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을 통해 연쇄적으로 투하가 이뤄지도록 되어 있었다.
특히 트리넬에 대해서는 단순한 군사적 효과를 넘어 "정신적·상징적 중심지를 제거함으로써 국가 정체성의 연쇄 붕괴를 유도한다"는 분석이 문건에 명기되어 있었다. 보고서에는 “트리넬은 마베라인들의 신화적 세계관이 실재화된 공간이며, 그들의 마지막 신뢰의 거점이다. 이 도시는 무너져야 한다. 눈앞에서 신이 무너져야 그들은 항전을 멈춘다”는 문장이 등장할 정도로, 작전은 종교적 상징 파괴를 중요한 축으로 삼고 있었다. 이 작전은 단순한 군사 작전이 아니라 이념적 전쟁, 문명 전쟁, 심리 전쟁을 모두 포함한 총체적 파괴 구상이었다.
작전 수행은 전략사령부 소속 전략폭격기 편대와 잠수함 전력, 미사일 사령부가 3단계 체계로 나누어 진행하도록 되어 있었으며, 작전 성공률을 보장하기 위해 대규모 전자전 공격, GPS 교란, 마베라 방공망 무력화 계획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심지어 작전문건 부록에는 "피폭 이후 인도주의적 접근을 위한 연출 시나리오", 즉 공격 직후 구호 물자를 대량 투입해 국제 여론의 비난을 회피하는 방법론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민들레 작전은 내부적으로 “Terracleansing(대지 정화)”라는 코드로도 불렸으며, 웨스타시아 국방부 내부 문서에서 이 작전은 “고대적인 비이성 국가에 대한 문명적 외과수술”로 표현되었다. 이 문서에 따르면, 마베라는 “시장의 기능이 봉쇄되고, 여성과 청소년에게 교육이 배제되며, 이념적으로 봉건주의와 신정주의가 뒤섞인 유령국가”이며, “마베라의 저항하는 생존 자체가 폭력”이라는 논리적 비약이 강조되었다. 즉, 웨스타시아는 핵공격을 단순한 전쟁수단이 아니라 “문명 갱신 도구”로 간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작전은 극비리에 수립되었고, 대통령직속 국가작전본부(NSCC)가 최종 통제권을 가지며, 실행 지휘권은 국방장관을 거쳐 합동전략사령관에게 하달되는 구조였다. 웨스타시아 대통령은 당시 비공식 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는 기록이 있다.
“우리는 더 이상 이성과 협상의 언어로 그들과 말할 수 없다. 이제 우리가 말할 차례다. 불로, 충격으로, 재로 만들어 말하자. 세상이 무서워해야 할 것은 그들이 아니라 우리라는 것을 상기시켜줄 시점이다.”
계획은 1984년 5월 27일 04:00에 일제히 실행될 예정이었으며, 마베라 전체 인구의 30% 이상이 핵피격 직후 3일 내에 사망할 것으로 추산되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 계획이 현실화되는 일은 없었다.
1984년 5월 7일, 작전 개시를 불과 19일 앞둔 시점, 웨스타시아령 유고랜드 상공을 통과하던 루이나 국가정찰국(NRO)의 위성 나이트스코프-7호가 유고랜드 중남부의 BPX-14 핵무기 저장고 인근에서 비정상적 중성자 반응과 방사선 동위원소 흡수 패턴을 감지한 것이 발단이었다. 이 패턴은 플루토늄과 우라늄 기반 열핵폭탄이 대규모로 이동하거나 무장되는 초기 징후와 일치했다. 루이나 정보국은 즉시 상설위성관제통합체계(FORSAT)를 통해 분석에 착수했고, 국가정보국(NIA) 역시 웨스타시아 고주파 통신망에서 반복적으로 교신되는 암호어 “LZ-α”, “Cascade 9”, “Red Waterfall” 등을 포착해, 내부적으로 ‘전술 이상의 조짐’이 있다는 평가를 내렸다.
결정적 돌파구는 NIA 산하 사이버침투분석국(CADU)의 블루파이어 팀이 수행한 웨스타시아 합동전략지휘국 중앙노드 침입 작전이었다. 블루파이어는 침투 48시간 만에 ‘LZ-α: Echelon Cascade Nuclear Solution’이라는 제목의 암호화 문건 파일과 그 하위 실행지침, 지도 기반 목표 설정자료, 예상 민간 사망자 추계표, 그리고 핵공격 이후 국제사회 대응 시뮬레이션 보고서까지 포함된 총 6GB 분량의 문서를 확보했다.
해당 문건은 5월 9일 오전, 루이나 대통령 테디 해밀턴에게 직접 보고되었고, 그는 이를 “악마가 인간의 형상을 한 채 지옥을 설계하는 장면”이라 표현하며 긴급 국가안보회의 소집을 지시했다. 회의는 루이나 대통령궁 내 지하 작전실에서 비공개로 이루어졌으며, NRO와 NIA, 국방부, 외무부, 국가안보실 등 주요 부처가 참여한 가운데 작전 내용을 1차 검토한 결과, 단순한 전술핵 사용이 아니라 마베라라는 국가 자체를 삭제하려는 전략적 대학살 계획임이 확인되었다.
2.6.1. 루이나의 2차 경고 [편집]
루이나 공화국 외교부는 웨스타시아 합중국이 비밀리에 수립한, 이른바 "민들레 작전(Operation Löwenzahn)"[2]이라는 핵무기 사용 계획을 전면 폭로하며, 이에 대해 가장 극단적이고 단호한 어조로 규탄하는 바이다.
본 작전은 더 이상 군사전략의 범주에 있지 않다. 이것은 국가적 계획에 기반한 문명 학살 시도, 곧 핵무기를 이용한 정치적 제노사이드에 다름 아니다. 전략핵과 전술핵을 병렬적으로 동원하여 마베라의 수도 트리넬을 비롯한 9개 대도시를 동시에 파괴하려 한 이 계획은, 민간인을 직접 대상으로 설정한 사상 초유의 전시 범죄이며, 그 잔인함과 체계성에 있어 히틀러의 전차보다, 핵탄두의 냉소가 더 치명적인 시대가 도래했음을 경고하고 있다.
루이나 정보기관이 확보한 문건에 따르면, 이 작전은 단순한 전황 전환을 위한 군사적 조치가 아니라, 마베라를 '사라지게 만들기 위한' 문명 소거 전략(Civilizational Erasure Strategy)이었다. 웨스타시아는 트리넬을 '국민의 정신적 심장'이라 정의한 뒤, 그 심장을 불로 태우고 재로 만들려 했다. 이는 제네바 협약은 물론, 인간이 가진 최소한의 윤리와 이성조차 파괴하려는 파시즘적 파괴의 계획표이다.
루이나는 이에 다음과 같은 5개 항의 경고를 즉시 발효하며, 이는 단순한 외교적 수사에 그치지 않음을 명확히 밝힌다.
1. 웨스타시아는 로벤자운 작전의 존재를 전면 시인하고, 관련 문서·전파명령·핵무기 운용계획의 완전한 폐기를 국제사회 앞에서 약속해야 한다.
2. 마베라 주변 해역과 국경지대의 핵탄두 및 운반 수단은 전면적으로 해체되어야 하며,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긴급 사찰단을 무조건 수용할 것을 명한다. 웨스타시아가 이를 거부할 시, 핵비확산조약(NPT) 탈퇴국으로 간주할 것이다.
3. 루이나는 핵확산 방지조약에 따라, 웨스타시아의 전략적 핵 위협은 곧 루이나 국민과 영토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한다. 이에 따라 루이나는 핵을 포함한 모든 수단을 고려한 자위권 발동 범위 내 대응 조치를 검토하고 있으며, 이 조치는 언제든 현실화될 수 있다.
4. 루이나는 본 사안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긴급 안건으로 상정하며, 국제법상 정의된 ‘집단 학살의 사전 기도’에 해당하는 행위로서 국제형사재판소 회부 가능성을 검토 중이다.
5. 루이나는 해당 위협이 제거되고 국제 검증이 완료되기 전까지, 웨스타시아 및 그 속령의 선박, 항공기, 자산, 항만에 대해 전면적·선별적 해상봉쇄 및 항행 통제 조치를 시행할 것이며, 이 조치는 자위권과 핵확산 방지 원칙에 따라 정당하다.
루이나는 다시는 히로시마가 반복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역사를 후회로 되풀이하지 않겠다. 웨스타시아가 그 손으로 불을 지르려 한다면, 루이나는 그 불 앞에 맨 먼저 서서 막을 것이다. 꺼질 때까지. 끝까지.루이나 외교부의 웨스타시아에 대한 2차 규탄 및 최후 경고
루이나 외교부의 2차 경고문은 단순한 외교적 항의가 아니었다. 그것은 일종의 선전포고 없는 선전포고였다. 이 성명은 외교 언어의 형식을 빌렸을 뿐, 그 본질은 철저하게 군사적 억지와 국제적 고립 조치를 선언하는 일방적 경고문이자, 웨스타시아의 파시즘적 핵무장 전략을 문명에 대한 반역행위로 규정한 도덕적 기소장이었다.
성명은 공개 직후 루이나 국영방송, 국제통신사, 외교 전문지를 통해 실시간으로 전파되었고, 전 세계 각국의 외무부에 동시에 송달되었다. 무엇보다 주목받은 대목은 5항에 명시된 ‘해상봉쇄 조치(seaborne interdiction)’였다. 이는 루이나가 그간 신중하게 아껴두던 선제적 통상봉쇄 카드를 꺼낸 것이며, 평시 외교에서 보기 드문 경제적·군사적 강압 조치였다. 루이나 국방부는 이에 따라 제2,3함대를 각각웨스타시아 해역과 유고랜드 해역에 전방 배치하고, 웨스타시아 선박 식별 매뉴얼과 차단 전술 지침을 전군에 하달했다. 곧이어 루이나 해군은 "그레이 라인 작전(Operation Grey Line)"이라 명명된 봉쇄 임무를 개시한다.
성명문의 어조 또한 전례 없이 강경했다. “우리는 더 이상 역사를 후회로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마지막 문장은, 루이나의 외교 언어에서 자주 등장하지 않는 명백한 무력 사용의 암시였다. 실제로 외교가에서는 이 발언을 두고, “루이나가 웨스타시아의 핵 위협을 자국 영토에 대한 위협과 동일시하며, 사실상 핵 억지 체계 내의 적성국으로 공식 지정했다는 의미로 본다”는 분석이 주류를 이뤘다.
또한 루이나는 이 성명을 통해 웨스타시아의 행위를 단순한 외교적 실책이나 군사적 오판이 아닌, 국가의 정체성 자체가 파시즘과 핵전략주의에 물들어 있음을 고발하는 선언적 행위로 승화시켰다. 로벤자운 작전이 단순히 실무 수준의 군사 옵션이 아니라, 웨스타시아 집권층의 이념과 전략의 총합이라는 사실이 드러났을 때, 루이나는 이를 도덕적 전선의 출발점으로 삼은 것이다.
성명 발표 직후, 플로렌시아·북산·빌베른·동사랜드·사비에트 등지에서 루이나의 대응을 지지하는 공동 성명이 이어졌고, 일부 국가는 웨스타시아 외교관의 추방 절차에 착수했다. 국제 언론은 루이나의 강경 노선을 “전쟁을 막기 위한, 가장 날카로운 외교”라고 평했다.
2.7. 일시적 휴전 [편집]
1984년 5월 중순, 루이나 외교부의 2차 경고와 더불어 해상봉쇄 조치가 개시되면서 웨스타시아는 외교·군사·경제의 세 갈래에서 압박을 받기 시작했다. 플로렌시아는 자국 내 웨스타시아 자산을 동결했고, 사비에트는 전략군을 랜드해 북부 방향으로 이동시켰으며, 사흘 만에 총 17개국이 웨스타시아 외교관을 추방하거나 대사관을 축소했다. 루이나는 ‘그레이 라인 작전(Operation Grey Line)’을 통해 서부 해상 교통로를 전면 차단했고, 랜드해 서부 인근 해역에서 웨스타시아 국적 선박 6척이 항로 변경을 강제당했다.
국제여론은 폭발했다. 유엔 긴급 안보리 회의에서 루이나 외교대표단은 로벤자운 작전의 전문 일부를 공개하며, “이 작전은 국가 안보가 아니라 국가 학살을 위한 준비였고, 이는 단지 하나의 계획서가 아니라 한 국가가 체계적으로 구축한 파멸의 기술서였다”고 규탄했다. 국제신문들은 “죽음을 위한 지도”, “트리넬을 지우려 한 자들” 같은 헤드라인으로 보도했다.
이러한 압박이 이어지는 가운데, 웨스타시아 내부에서도 이례적인 균열이 포착되기 시작했다. 5월 18일, 웨스타시아 공군 전략사령부 내부에서 익명의 고위 간부가 로벤자운 작전의 실행계획 일부를 국제 군사감시기구(IMOV)에 넘긴 사실이 확인되었고, 해당 인사는 플로렌시아에 망명 요청을 제출했다. 그는 작전이 “단순한 시뮬레이션이 아니라, 특정 날짜에 정해진 타격 명령이 포함된 실행 전야 단계였다”고 증언했으며, 이 폭로는 국제사회의 경악을 넘어 웨스타시아 내부의 결속 붕괴 가능성을 시사하는 신호탄이 되었다.
여론은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웨스타시아 정부 내부의 ‘전술 유연성 확보론자’들과 ‘강경 집행파’ 간의 격렬한 충돌이 비공식 회의록을 통해 외부로 새어나왔다. 최고지도부는 결국 정치적 보존을 택했다. 전면전이 아니라 실패한 도박으로부터의 후퇴, 그것이 그들이 선택한 유일한 출구였다. 1984년 5월 24일 오전 11시, 웨스타시아 국방부 대변인은 다음과 같은 공식 성명을 발표했다.
국제여론은 폭발했다. 유엔 긴급 안보리 회의에서 루이나 외교대표단은 로벤자운 작전의 전문 일부를 공개하며, “이 작전은 국가 안보가 아니라 국가 학살을 위한 준비였고, 이는 단지 하나의 계획서가 아니라 한 국가가 체계적으로 구축한 파멸의 기술서였다”고 규탄했다. 국제신문들은 “죽음을 위한 지도”, “트리넬을 지우려 한 자들” 같은 헤드라인으로 보도했다.
이러한 압박이 이어지는 가운데, 웨스타시아 내부에서도 이례적인 균열이 포착되기 시작했다. 5월 18일, 웨스타시아 공군 전략사령부 내부에서 익명의 고위 간부가 로벤자운 작전의 실행계획 일부를 국제 군사감시기구(IMOV)에 넘긴 사실이 확인되었고, 해당 인사는 플로렌시아에 망명 요청을 제출했다. 그는 작전이 “단순한 시뮬레이션이 아니라, 특정 날짜에 정해진 타격 명령이 포함된 실행 전야 단계였다”고 증언했으며, 이 폭로는 국제사회의 경악을 넘어 웨스타시아 내부의 결속 붕괴 가능성을 시사하는 신호탄이 되었다.
여론은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웨스타시아 정부 내부의 ‘전술 유연성 확보론자’들과 ‘강경 집행파’ 간의 격렬한 충돌이 비공식 회의록을 통해 외부로 새어나왔다. 최고지도부는 결국 정치적 보존을 택했다. 전면전이 아니라 실패한 도박으로부터의 후퇴, 그것이 그들이 선택한 유일한 출구였다. 1984년 5월 24일 오전 11시, 웨스타시아 국방부 대변인은 다음과 같은 공식 성명을 발표했다.
“웨스타시아 정부는 최근 논란이 된 RZ-α 계획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한다. 해당 기획은 전쟁 시나리오의 일환으로 내부적 검토에 머물러 있었으며, 실제 집행 결정은 없었다. 그러나 불필요한 오해와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 본 작전은 전면 폐기되었음을 밝힌다. 또한, 마베라 전선의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인도주의적 고려와 정치적 해법 탐색을 위해, 전선 일시 중단 및 작전 정지(Operational Pause)에 동의한다.”
웨스타시아는 끝까지 ‘폐기’가 아닌 ‘해체’, ‘정지’가 아닌 ‘재조정’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그것은 누구도 믿지 않았다. 국제사회는 곧바로 반응했다. 마베라 총리는 기자회견을 통해 “그들의 입에서 평화가 나왔다면, 그것은 우리가 맞서 싸웠기 때문”이라 말했고, 루이나 대통령 조지 해밀턴은 전국 담화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 그 작전은 무너졌다. 그러나 우리가 무너뜨린 것이 아니다. 그 작전은 스스로의 비인간성과 야만성에 짓눌려 쓰러진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드러냈고, 멈추게 했다. 그리고 우리는 잊지 않을 것이다. 이 고요가 진짜 평화가 아님을.”
이후 마베라와 웨스타시아 간의 국지적 충돌은 중단되었고, 교전지대에는 휴전선이 설정되었다. 루이나는 휴전 직후 의료지원단·전후복구계획팀·전쟁범죄 감시기구를 마베라 현지에 파견하면서 사후 조치에 대한 선도적 역할을 맡기 시작했고, 유엔은 이 사안을 "현대 이후 가장 위험했던 핵전쟁 직전의 순간"이라 결론지었다.